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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배


 

 

 

 

그의 손은 아름다웠다. 하얗고 손가락이 길어서 인형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손 자체는 크지 않았지만, 손톱은 항상 단정하게 잘려있었고 색도 연한 분홍색이었다. 건드리면 인형의 것처럼 뚝 떨어질 것 같은 그 손은 막상 만져보면 단단하게 굳은살이 박여있었다. 손가락이 아주 딱딱했다. 무엇보다 항상 차가울 거라고 생각하게끔  만드는 하얀 손은 예상외로 뜨거워서 맞잡을 때마다 깜짝 놀라곤 한다. 단단하고 뜨거운 손을 맞잡을 때면 볼품없는 자신의 손은 먹혀버릴 듯 움츠러들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오기로 더 세게 악수하기도 했다. 보쿠토는 그저 웃었다.


 

 

“따라오지 마세요.”
“에이, 좀 같이 가자. 오늘 간식은 뭐야?”
“애초에 우리 집에 오지 마세요.”

 

 

심지어 같은 학교였다. 2학년에 올라오고 나서야 알았다. 학교 게시판에 자신과 그의 악수장면이 떡하니 붙어있었다. ‘후쿠로다니의 자랑!’ 이라는 부끄러운 게시글과 함께. 그것도 선배였다. 알고 나니 학교에서 꽤 유명한 사람이었다. 3학년 피아노 전공자 중 제일 잘 치는 사람으로.
 

더군다나 동네가 가까워서 길을 걷다 보면 자주 마주치곤 했다. 반갑게 인사해오는 보쿠토를 아카아시는 무시하기 바빴다. 아니, 사실은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그 손에, 그 눈에, 매료된다. 올곧게 자신을 바라보는 눈을 마주하면 아카아시는 금방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못하고 입만 벙긋거리기만 했다. 하지만 보쿠토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끈질기게 말을 붙였고 옆으로 따라왔으며 심지어 집 안으로 들어오기도 했다. 넉살좋게 인사도 하면서, 기어코 아카아시의 어머니가 내준 간식까지 먹어치우고 나서야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와 함께 있으면 정신이 없어서 질질 끌려다니기만 했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치 사랑에 빠진 소녀마냥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아줌마, 저 가볼게요. 간식 잘 먹었습니다.”
“어머, 보쿠토군. 더 놀다가지 그러니.”
“아니에요. 야, 아카아시, 나 간다!”

 

 

방으로 들어가려는 내게 인사하는 그를 무시하고 문을 쾅 닫았다. 밖으로 둘의 대화가 들린다. 미안해, 아줌마가 혼낼게. 괜찮아요, 안녕히 계세요. 현관문이 닫히고 나서야 조용해졌다. 이런 것은 익숙하지 않다. 전혀, 익숙하지 않다. 이 집이 시끄러웠던 적은 아주 오래전, 기억이 바래진 그때 뿐이었다. 아카아시는 잘게 고개를 저어 상념을 털어냈다.

 

피아노나 치러가자. 아카아시는 짧게 한숨을 쉬고는 학원에 갈 준비를 했다. 사실 집에도 연습실은 있었다. 구형이지만 아주 좋은 피아노가 있었고 방음도 잘 되어있는 방이다. 하지만 아카아시는 그 방에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그 앞을 지나가지도 않았다. 그 방의 시간은 그 날로부터 멈춰있었다. 저릿하고 아파오는 가슴께를 아카아시는 손으로 꾸욱 눌러 참았다.
 

동네 피아노학원은 아카아시가 어릴 때부터 다녔던 곳이다. 선생은 아카아시를 위해 초등, 중등부 아이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학원을 닫아야 할 때, 닫지 않았다. 선생은 그의 연주를 듣는 것을 좋아했다. 이제는 자신이 가르치지 않아도 될 만큼 성장한 제자의 연주를 듣는 것이 하루의 낙이었다.

 

 

“아카아시 왔구나. 기다리렴. 아직 학생 한 명이 남아있어서.”

 

 

학원은 아늑했다. 그렇게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아카아시는 신발을 벗어 한쪽에 가지런히 놓아두었다. 그리고 반질거리는 바닥에 살며시 발을 올렸다. 마음이 편해지는 장소였다. 아카아시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학원에는 반짝반짝 작은 별 연주가 울리고 있었다. 서툴고 느린 연주였지만 용케 틀리지 않았다. 아카아시는 쇼파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았다. 반짝, 반짝, 작은별..아름, 답게, 비추네.. 아카아시, 이리 와보렴. 이게 도, 란다. 그건 미. 아버지는 자주 그를 무릎에 올리고 피아노를 알려줬다.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방에 천천히 차오르던 작은 별 연주. 이제는 아버지의 얼굴이 흐릿하다. 부드러웠던 그 목소리만 또렷하게 귓가에 남아 맴돌았다.

 

 

“...아시...아카아시 케이지!”

 

 

아카아시는 눈을 번쩍 뜨고 일어났다. 선생의 얼굴이 가까웠다. 작은 별 연주는 어느새 끝나 학원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피곤한 거냐. 아무리 불러도 못 듣고. 학생은 갔다.”

 

 

선생의 걱정스러운 말에 그는 죄송하다고 작게 중얼거리고는 학원 한가운데, 제일 큰 그랜드피아노 앞에 섰다. 학원에서 이 피아노를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 한 명, 아카아시 케이지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선생도 처음 학원을 차릴 때는 단지 욕심을 부려 비싼 것을 샀지만 제대로 연주한 적은 없었다. 어차피 전시용이기도 했지만 그는 이 피아노를 아카아시가 10살 콩쿨에서 우승했을 때 과감하게 양보했다. 이제 이건 네꺼다! 라며, 학원이 끝나고 이 피아노로 연습하라고 말이다.

 

 피아노 앞에 앉은 아카아시는 반짝반짝 작은 별의 변주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집중하는 제자를 위해 선생은 잠시 자리를 피해주었다. 그가 얼마나 이 곡을 사랑하는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아랫입술을 살며시 깨물고 연주에 집중했다. 반짝이는 별의 무리 너머로 아버지의 모습이 흐리게 보였다.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쳐주었던 변주곡에 빠져 자신도 피아니스트가 되겠다, 소리쳤었다.  
 

곡이 고조되고 아카아시는 손가락에 더욱 힘을 주고 건반을 눌렀다. 별들이 폭발하는 은하수 너머, 아카아시는 그의 아버지를 보기 위해 연주했다. 항상 곡의 클라이맥스에서 사라지는 아버지의 얼굴을, 아카아시는 잡지 못했다. 아카아시는 연주를 하면서, 아버지를 쫓으면서, 작은 별들이 죽고 새로 태어나는 은하수를 떠올리면서, 그렇게 저 멀리 빠져들었다. 별들의 죽음, 잘게 부서져 반짝임을 흩뿌리고, 그들의 무덤은 그렇게 아름답다.

 

그 순간 아카아시는 아버지의 형상이 사라지고 보쿠토의 연주모습을 떠올렸다. 아카아시는 흠칫, 눈을 뜨며 연주를 멈추었다. 왜, 그 사람이 생각난 걸까. 조명을 받아 화려하게 빛났던 은빛 머리칼과 연주가 생각보다 깊게 자신에게 파고들었노라고, 애써 담담하게 넘겼다. 그였다면 이 부분에서 좀 더 즉흥적으로.. 아카아시는 천천히 보쿠토의 연주방식을 더듬이며 따라 해보았다. 아까와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강하게 내리누르고, 점점 빠르게.. 하지만 보쿠토와 똑같지 않았다. 어설프게 흉내 내는 것에 그쳤다. 손이 욱신, 하고 아려오더니 조금 떨렸다. 보쿠토보다 약하게 눌렀을 게 분명한데도 손가락이 아파왔다. 지나가는 말로 자신은 손가락 힘이 너무 강해 현을 여러 번 끊었었다고 보쿠토가 이야기해준 적이 있었다. 새삼 그 말이 실감나서 아카아시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자신은 생각보다 대단한 사람을 만난 건지도 모른다고, 아카아시는 두 손을 꾸욱 맞잡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질 수 없다. 아카아시는 다시 피아노 위로 손을 올렸다.


 

 

 

 

3. 모르겠어

 

 

 

 

 

“헤이,헤이,헤이!”

 

 

 아, 보쿠토상이다. 아카아시는 뒤에서 들리는 구호에 재빨리 가방을 챙겨 반을 빠져나왔다.

 

 

“아!카!아!시! 같이 가자!”

 

 

뒤에서 뛰어오는 소리에 아카아시는 조금 더 발걸음을 빨리했다. 뛸까, 고민하는 사이 보쿠토가 한 발 먼저 아카아시를 덮쳐 그의 등에 무게를 실었다. 무겁습니다, 보쿠토상. 작게 투덜거리는 아카아시의 머리를 헝클이며 보쿠토는 해맑게 웃었다.
 

그 때의 대회 이후 학교에서 마주친 둘은 보쿠토의 열렬한 끈질김으로 인해 제법 친해졌다. 이제 막 개학하고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았다. 보쿠토는 꾸준히 아카아시의 반으로 내려왔고 덕분에 친구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 보쿠토 선배가 아카아시를 보러 내려왔어!, 라며 제멋대로 소문은 부풀어졌지만, 그저 해맑게 행동하는 보쿠토에 그 소문도 금방 수그러들었다. 둘은 학교 내에서 그냥 친한 선후배 사이였다. 다만 그 두 명이 학교에서 제일 피아노를 잘 치는 1등과 2등일 뿐이다.

 

 

“아카아시, 너 이번 봄 대회 나가?”
“아, 도쿄청소년 콩쿨 말씀하시는 거죠? 저는 안 나갑니다.”
“뭐! 왜? 왜 안 나가? 왜? 왜?”

 

 

예상대로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옆에서 길길이 날뛰었다. 아카아시는 익숙하다는 듯이 그런 보쿠토의 가방을 잡아 뛰지 못하게 하며 차분히 대답했다.

 

 

“저는 여름방학에 있는 전국 콩쿨을 노려서요. 더 큰 대회기도 하고. 보쿠토상은 나가십니까?”
“응. 나는 당연히 너도 나올 줄 알았는데...그보다 나는 전국 콩쿨 안 나간다고!”
“...네, 뭐. 그래도 저는 나가는데요.”

 

 

보쿠토는 답지 않게 시무룩해지며 가방 끈을 매만졌다. 빳빳하게 세운 은빛 머리칼이 추욱 쳐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보쿠토는 금방 살아나 아카아시를 회유하려 노력했다. 그것은 아카아시의 집으로 갈 때까지 계속되었다. 사실 도쿄청소년 콩쿨에 나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도쿄 시내에서 열리는 대회지만 비교적 크지 않은 규모였고 출제곡도 쉬운 것으로 정하면 되는데다 아직 신청기간도 남아있었다. 그러나 아카아시는 전국 콩쿨에 집중하고 싶었다. 괜히 여러 대회에 나갔다가 연습만 어중간하게 할 바에는 그것이 나을 것이라는 게 아카아시의 생각이었다.

 

 

“나랑 같이 나가자, 응? 재밌을 거야! 나 벌써 곡도 정했어! 응? 제발. 아카아시이- 같이 나가자아!”
“안 나간다니까요. 그 대회는 벌써 다다음주잖아요. 보쿠토상은 연습안하십니까? 그보다 또 우리집에 오실 생각 하지도 마세요.”

 

 

하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보쿠토는 아카아시에게 매달려 현관으로 들어온 뒤였다. 어머니가 보쿠토를 보며 반기는 것을 뒤로하고 방으로 향했다. 자신보다 훨씬 큰 남자가 징징거리는데도 딱히 보기 싫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이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인 듯 보쿠토를 달랬다.

 

 

“보쿠토군, 왜 그래. 우리 케이지가 또 쌀쌀맞게 대했니?”
“어머니!! 아카아시, 이번 도쿄청소년 콩쿨 나가게 해주세요! 저 이번에 나가는데, 꼭 같이 대회에 나가고 싶어요. 네?”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보쿠토상. 어머니가 곤란해 하시니까 이리오세요.”

 

 

그의 어머니가 자신에게 매달리는 보쿠토를 어찌하지 못하자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뒷덜미를 잡고 쇼파에 앉혔다. 그리곤 오늘의 간식인 케이크를 한 조각 잘라 그의 앞에 놓아주었다. 그 과정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고 보쿠토도 익숙하게 접시를 들고 케이크를 먹었다. 눈은 잔뜩 시무룩해진 채, 더는 칭얼거리지는 못하고 그저 반짝이는 눈으로 아카아시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보셔도 안 되는 건 안 됩니다. 보쿠토상.”

 

 

황금빛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서는 맹렬히 자신을 바라보는 것에도 아카아시는 눈도 깜짝 하지않고 케이크를 한 입 먹었다. 그 단호한 모습에 보쿠토는 누구보다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는 도움을 바라듯 그의 어머니와 아카아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머니를 그렇게 보셔도 안 됩니다. 애초에 다다음주가 대회인데 이제 와서 준비하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너라면 할 수 있어! 잘 치잖아!”

 

 

그냥 무시하는 게 좋겠다. 아카아시는 조각케이크 위의 딸기를 찍어 한입에 먹었다. 보쿠토의 목소리는 컸고 아카아시를 어지럽게 하기는 충분했다. 더군다나 보쿠토가 조르기 시작하면 아마 대회 전날까지 징징거릴 터였다. 그리고 대회가 끝나서도 두고두고 아카아시를 원망할게 틀림없었다. 아카아시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아, 알겠어요! 나가요, 나갈게요. 나가면 되잖아요.”

 

 

 

계속 뭐라 뭐라 칭얼거리고 떼를 쓰던 보쿠토가 한순간 목소리를 멈추고 아카아시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카아시는 질끈 감았던 눈을 살짝 떠서 그런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이때쯤이면 좋아서 날뛰어야 정상일 텐데, 아카아시는 작게 보쿠토상..? 하고 그를 불렀다.

 

 

“우,우아아!! 정말? 진짜? 진짜지? 우와, 아카아시, 기뻐! 헤이, 헤이! 나갈 거면서 튕기기는! 아자아!!”

 

 

역시나. 보쿠토의 금안이 반짝였다. 그는 쇼파 위를 방방 뛰어다니며 아카아시의 어머니와 하이파이브까지 했다. 아카아시는 날뛰는 보쿠토를 말릴까 하다가도 그만두었다. 그냥 나머지 케이크를 먹을 뿐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슬쩍 미소를 지었다. 케이크가 맛있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장미의 아다지오> 할 거야. 학교 연습실에서 같이 연습하자. 선생님한테 말하면 열쇠 받을 수 있을 테니까, 응?”
“또 오케스트라 곡 하세요? 더군다나 그거 2인용이잖아요.”
“그냥 조금 편곡하지, 뭐.”

 

 

그거..대단하네요. 아카아시는 조금 멍하니 대답했다. 보쿠토는 신발을 신으면서 계속 재잘거렸고 아카아시는 그 말에 번번이 알겠다고 대답해주었다. 이렇게까지 기뻐할 일인가, 생각이 들 정도로 보쿠토는 기뻐보였다. 그는 내일 보자며 아카아시의 머리를 헝클었고 크게 인사를 한 뒤 나갔다. 폭풍이 왔다 간 것 같았다. 보쿠토가 나가자 무겁게 내려앉는 침묵이 어색했다. 계속 조용했던 집인데 든 자리는 몰라도 난자리는 안다며 며칠 보쿠토가 왔다갔다고, 제법 쓸쓸했다. 나간다고 했으니 어쨌거나 곡을 정해야했다. 아카아시는 슬쩍 자신의 어머니를 보라보았다. 아까와는 다르게 굳은 얼굴로 접시를 치우는 그녀를 보며 아카아시는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을 틀었다.

 

 

 

“그 아비에 그 자식이네. 쓸모없는 놈.”

 

 

 

뒤로 들려오는 날카로운 말에 아카아시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나 곧 방으로 들어갔고 학원에 가기위해 가방을 가지고 나왔다. 설거지는 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본 아카아시는 다녀오겠다는 말을 하려다말고 입을 꾸욱 다물었다. 배가 욱신거렸다.


 

 

 

 

*


 

 

 

 

아카아시는 컴퓨터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책상을 툭툭 치기를 반복했다. 동그란 안경이 콧등을 타고 살짝 흘러내리자 아카아시는 다시 안경을 추켜올렸다. 도쿄청소년 콩쿨 홈페이지에서 신청서를 다운받은 아카아시가 그 위에 이름만 적고 곡 명을 적지 못해 고민하고 있었다. 쉬운 곡으로 하고 싶었는데, 보쿠토와 함께 출전한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다. 아카아시는 마음속으로는 이미 정했지만, 그것이 생각보다 길고 어려운 곡이라 신청란에 적기를 꺼리고 있었다. 더군다나 연습시간도 촉박하고..


 

 

“하아. 모르겠다.”


 

 

아카아시는 눈을 질끈 감고 끄응, 거리더니 곧 타자기를 탁탁 눌러 제목을 입력했다. <사랑의 슬픔>. 프리츠 크라이슬러의 작곡을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가 편곡한 것으로 우수를 띤 아름다운 서정성을 솔로 피아노로 담은 곡이었다. 이메일로 신청서를 제출한 아카아시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예전에도 한 번 쳤던 곡이니, 그래도 괜찮겠지 싶은 마음에 아카아시는 바로 악보를 뒤적였다. 몇 장 넘기지 않아 바로 나오는 악보를 꺼내 들고 따로 파일에 담았다. 그리고 아카아시는 휴대폰을 꺼내 보쿠토에게 문자를 넣었다.

 

 

[사랑의 슬픔, 으로 정했어요.]

 

 

문자를 보내고 휴대폰을 휙 침대에 던진 아카아시는 무릎에 손가락을 움직여 피아노 음을 생각했다. 그러다 자리에서 일어나 학원에 갈 채비를 했다. 이럴 시간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연습해야 대회에서 창피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옷까지 다 챙겨입은 아카아시가 침대에 놓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자마자 안에서 진동이 울렸다.

 

 

[헤이헤이헤이! 잘해보자고!]

 

 

문자에서 보쿠토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아카아시는 저절로 떠오르는 경쾌한 목소리에 피식 웃고는 꾸욱 휴대폰을 쥐었다. 어쩐지 마음이 끓어올랐다. 이런 기분은, 오랜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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